대티골 ?
- 작성일
- 2015.07.29 10:07
- 등록자
- 대티골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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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9
일제 강점기 때, 광산만 쳐다보고 살았다. 자원수탈의 현장에서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 속에 차곡차곡 묻어두고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열악한 광산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당시에는 이곳에 200여 호가 넘는 가구가 살았으며 주막과 식당 등 광부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던 가게들이 많았다고 한다. 용화제련소였던 대티골 내 일월산 자생화공원은 아직도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을에 광물 제련소가 있었던 탓에 생활환경도 열악하였다. 각종 유독화학물질을 다량 사용해야 하는 제련소의 특성 때문에 물과 토지가 오염됐고 미세먼지와 화학약품의 지독한 냄새 때문에 늘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제련소와 광산이 문을 닫으면서 열악한 환경은 조금 나아졌지만 생활은 더 궁핍해졌다. 농사를 짓고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토지, 그래서 산에 기대서 살 수 밖에 없었다. 굽이굽이 올라가는 옛 국도를 걷다보면 “영양 28㎞”라 표시된 녹 슬은 이정표를 볼 수 있다. 이 국도를 만드는데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됐을까. 도로 붕괴를 막기 위해 군데군데 돌로 벽을 쌓은 것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31번 국도가 생기기 전까지 옛 국도는 대티골과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그들의 삶이 옛 국도 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힘들고 가난했던 때, 다른 여느 농촌이나 산촌처럼 서로에게 기대며 위로하고 위로 받고, 그렇게 함께 부둥켜안고 살아 왔다. 부족하지만 나눠 먹고, 서로의 아픔을 달래며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던 대티골사람들, 그들의 삶에 변화가 시작됐다. 2005년, 이곳으로 이주해 온 권용인씨, 그는 마을 안길과 옛 국도를 돌며 여러 가지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광산과 제련소를 보면서 역사를, 용화리 3층 석탑과 옛 용화사 터를 둘러보면서 문화를, 대티골사람들로부터 옛 이야기를 들으면서 삶의 고달픔을 알았다. 농사만 짓고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토지 탓에 궁핍한 생활을 면할 수 없음을 확인한 그는 과연 어떻게 하면 마을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티골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정리해 보았다. 토지와 돈이 없고 자연과 역사, 문화, 삶의 고달픔만 있었다. 결국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연과 문화, 역사, 가난을 자원화 하는 것뿐이었다. 가난이 큰 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역발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가난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된다. 아무리 애를 써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것이 마을 만들기 사업, 2008년 경북도로부터 이 사업자로 선정됐고 그 아이템은 자연과 인간이 건강하게 공존할 수 있는 “자연치유생태마을” 만들기다. 이 사업이 시작되면서 용화2리라는 행정상의 이름 외에 대티골이라는 옛 마을 이름이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옛 국도가 아름다운 숲길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대티골 아름다운 숲길은 생태적으로 보전할 가치고 충분하고 다른 숲길에 비해 인공적인 요소가 거의 없어 사람들이 걸으면 마음이 아주 편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숲을 출품하였다. 생명의 숲에서 주최하는 아름다운 숲 경진대회, 그 대회에서 대티골 숲이 어울림 상을 수상하였다. 자연과 인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숲이라는 뜻일 게다. 마을 만들기 사업을 통해 자연정화연못과 아름다운 숲길을 정비하고 우리의 전통난방방식인 황토구들방을 만들었다. 숲을 찾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휴식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서다.